책소개
국내 최초로 완역되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작품
「천 프랑의 보상」은 위고가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Guernsey Island)에 망명해 있을 무렵 『레 미제라블』을 완성한 후 사 년 뒤인 1866년에 집필한 것으로, 그의 소설의 주요 테마인 사회적 숙명을 다시 한 번 다루고 있다. 작품이 완성되자 오랜 공백을 깨고 나온 위고의 극작품이었기에 파리의 극단들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원고 여백에 1막의 복잡한 무대 구성을 세 번에 걸쳐 스케치하고, 원고를 마친 후에도 한 달 동안 수정 작업을 한 점으로 보아 상연을 목적으로 집필한 게 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검열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공연하겠다는 위고의 뜻에 따라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당시 라 포르트 생-마르탱 극장(Theatre de la Porte Saint-Martin) 대표의 공연 제안에 대한 답신에 그의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다.
"제가 이번 겨울에 쓴 이 희곡이 상연되려면 프랑스에서 자유 보장을 위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상연을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희곡은 공연을 위해 씌어졌고, 무대연극의 관점에 맞춰 완전히 각색된 작품입니다. 예술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상연될 수 있겠지만, 검열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돌아오는 날 제 희곡을 세상에 내놓겠습니다." ?빅토르 위고, 1866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파리의 대극장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무대에 다시 올리기 시작한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이 작품의 상연만큼은 거부했다. 1886년 『자유연극집』이 나올 때에도 이 작품만 포함되어 있지 않다가 1934년에야 출간되었고, 1961년 메츠 시립극장에서 위베르 지누(Hubert Gignoux)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위고의 「천 프랑의 보상」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자기검열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저자소개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 1802년 프랑스의 브장송에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위고는 첫 시집 『오데와 잡영집』(1822)으로 주목을 받은 이래, 희곡 [크롬웰](1827), 시집 『동방시집』(1829), 소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1829)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특히 [크롬웰]에 부친 서문은 고전주의 극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극 이론의 선언서로서, 위고가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희극 [에르나니](1830)의 초연이 낭만파와 고전파 사이의 ‘에르나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로부터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 후에도 위고는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며, 시집 『가을 낙엽』(1831), 『내면의 음성』(1837), 『햇살과 그늘(1840)』, 희곡 [마리용 드 로름](1831), [힐 블라스](1838) 등을 발표했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는 위고에게 민중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으며, 1841년에는 프랑스 학술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 뒤 위고는 10여 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고, 1848년 2월 혁명 등을 계기로 인도주의적 정치 성향을 굳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국외로 추방을 당하여,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 등에서 거의 19년에 걸쳐 망명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시집 『징벌』(1852), 『정관』(1856), 『여러 세기의 전설』(1부, 1859), 소설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들』(1867) 등 대표작의 대부분이 출간되었다. 특히,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하 역사소설로서, ‘인간의 양심을 노래한 거대한 시편’이자 ‘역사적, 사회적, 인간적 벽화’로 평가받는 위고 필생의 걸작이다.
1870년 보불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위고는 공화주의의 옹호자로서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874년에는 『93년Quatrevingt-treize』을 출간했다.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에 여담 형태로 삽입된 ‘워털루 전투’ 이야기는 위고가 벨기에 전적지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곳곳을 답사하는 노력 끝에 집필한 것이다. 위고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문체가 돋보이는 이 글은 일세를 풍미한 영웅 나폴레옹의 패배 과정을 극적이고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며 여운을 남긴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으나,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켜 정계에서 은퇴했다. 국민 시인으로서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고,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내며, 『웃는 남자』(1869), 『끔찍한 해』(1872), 『93년』(1874), 『여러 세기의 전설』(2부, 1877; 3부, 1883) 등을 발표했다. 1885년 5월 폐렴으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애도하는 가운데 그의 유해가 판테온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