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모두 26장으로부터 이루어져 있으며 군주의 권력 획득, 유지, 확대를 주제로 하고 있다. 우선 군주정의 종류와 그에 따른 통치 정책 및 권력 유지 방책을 검토한다. 특히 이상적인 군주상으로서 체사레 보르자를 제시한 제7장이 유명하다. 그다음에 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군사력에 대해 논하는데, 당시의 용병 제도를 비판하고 군주의 고유한 군사력 정비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이어 군주의 태도를 개별적으로 논한다. 이를테면 신민이 충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공포감 조성의 필요성, 잔인한 행위의 유용함, 신의에 대한 배반 등을 주장한다. 이 부분은 후에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비난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개선의 방도를 모색하며 메디치 가문이 희망의 주인공이 되어주기를 기원하며 끝을 맺는다.
저자소개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정치철학자, 음악가, 시인 그리고 희곡가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운동이 최고봉에 달했던 15세기 중반, 1469년 5월 3일. 마키아벨리는 ‘유럽의 꽃밭’이라 불린 피렌체에서 법학자인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와 바르트로메아 데 네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98년 약관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1500년 7월에 처음으로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던 그는 3년 뒤에 로마로 파견되어 체사레 보르자의 도움으로 교황에 선출된 율리우스 2세가 무모할 정도의 단호한 행동으로 세력을 직접 확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1512년 스페인에 의해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군주정이 복원되자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해 메디치 정부를 몰아내려다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투옥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메디치 가의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에 즉위하자 특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것은 실제 정치 이론을 반영 묘사한 그의 단편 The Prince [군주론]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530년대 초반에 인쇄되었는데,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작품을 돌렸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6세기 이후 사람들에게 가장 어필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을 받는 등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던 책, 군주론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후대에 냉혹한 정치, 술수 그리고 권력 추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위대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며, 군사전략가이자 사상가이며, 저술가이자 문학가였다.
정치가로서의 그의 명성은『군주론』을 통해 형성되었다.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난 그는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이탈리아의 내부 분열을 종식시키고 조국의 안정을 찾아 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기대를『군주론』이라는 정치사상의 고전으로 탄생시켰다. 무릇 정치사상이란 그 사상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을 모르고는 올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살던 피렌체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 그가『군주론』을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 즉 혼란했던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국가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군소 국가들 간의 대립, 외세의 침략 등 어지러운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이 강력한 군주로 등장해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 피렌체를 구해 줄 것을 염원하는 바람이 마키아벨리의『군주론』에는 담겨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문예의 토양을 바탕으로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희곡 『만드라골라』를 통해 부패한 지도층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만드라골라』는 이탈리아 연극 사상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 영혼보다 조국 피렌체를 더 사랑했다.”고 고백한 그는 관대하고 열정적이며, 정직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성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마키아벨리는 1520년 『피렌체사』집필을 시작하여, 1527년 메디치 군주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복원되었으나 6월 21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외세의 지배를 개탄, 강력한 군주 아래 통일되기를 열망하며 『군주론』, 『전술론』, 『로마사론』등의 명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