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최인호 장편소설 『지구인』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왔다. 이 소설은 1978년부터 1984년까지 7년 동안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작품으로, 특히 교도소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연재 도중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들의 아픔을 그린 내용이 대폭 삭제될 수밖에 없었고, 연재가 중단된 1980년 삼엄한 시대상황 속에서 뒷부분을 생략한 채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연재가 마무리된 1984년에는 중앙일보사에서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여전히 삭제된 부분을 복원할 수는 없었고, 1988년 개정판을 내면서 일부 보충할 수 있었다.
작가는 옛 작품에 다시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가 이번에 드디어 결정본이라 할 수 있는 개정판을 내었다. 월남전을 다녀온 윤중사와 윤중사의 여동생 윤혜옥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종세 이야기를 완벽하게 복원하고 보완했다.
중요한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복원했다 하더라도, 이미 20년 전에 씌어진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이 소설은 20년 전의 소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소설이라고 강조한다. 우선 사회의 가공할 폭력과 그 폭력이 강요하는 운명을 거스를 길 없는 초라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를 선도하고 있고, 비루하기 그지없는 하류 인생, 즉 김형중의 지적대로 '파르마코스'(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디오니소스 축제 때 집단적으로 살해당했던 밑바닥 사람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경향과 일치한다.
수많은 파르마코스들이 희생양으로 사라진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지구인』은 이제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제물로 삼은 파르마코스들은 사실 우리 안에 있다. 남의 가족이 죽더라도 내 가족은 잘살아야 하는 우리, 타민족은 기아에 허덕이더라도 우리 민족이 배부르면 괜찮은 우리,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우리 안에 '악'이 있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 '지구인'은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파르마코스인 것이다.
저자소개
최인호는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중심에 선 작가다. 세련된 문체로 ‘도시 문학’의 지평을 넓히며 그 가능성을 탐색한 그는 황석영, 조세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1970년대를 자신의 연대로 평정했다.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최연소 신문 연재 소설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 ‘책 표지에 사진이 실린 최초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신 시거를 피운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청계산에 오르는 생활 습관이 있으며 컴퓨터로 작업한 글은 "마치 기계로 만든 칼국수" 같고 왠지 "정형 수술한 느낌"이 들어 지금도 원고지 위에 한 글자, 한 글자씩 새긴다.
1945년 서울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 최인호는 서울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고등학교(16회) 2학년 재학 시절인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5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소설 『가족』을 연재하여 자신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가족』은 한 편 한 편이 짧은 연작소설이지만 우리 인생의 길고 긴 사연들이 켜켜이 녹아있는 한국의 ‘현대생활사’이다.
1973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파격적으로 조선일보에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화제가 되더니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또 얼마 뒤에는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모은다. 이후 「술꾼」, 「모범동화」, 「타인의 방」, 「병정놀이」, 「죽은 사람」 등을 통해 산업화의 과정에 접어들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변동 속에서 왜곡된 개인의 삶을 묘사한 최인호는 "1960년대에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 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 ‘상업주의 작가’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일간지와 여성지 등을 통해 『적도의 꽃』, 『고래 사냥』, 『물 위의 사막』, 『겨울 나그네』, 『잃어버린 왕국』, 『불새』, 『왕도의 비밀』, 『길 없는 길』과 같은 장편을 선보이며 지칠 줄 모르는 생산력과 대중적인 장악력을 보여준 최인호는 2001년 『상도』의 대성공 이후 제 2의 전성기를 맞으며 거듭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도 군부독재와 급격한 산업화라는 1970년대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던 장르인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가져 『바보들의 행진』『병태와 영자』『고래 사냥』 등을 통해 시대적 아픔을 희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만의 독특한 시나리오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꾸준한 관심의 결실로 1986년엔 영화 「깊고 푸른 밤」으로 아시아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분야들의 벽을 허물고 다양한 길을 보여주었다.
『샘터』지에 34년 6개월 간 연재한 '가족'을 건강상의 이유(2008년 발병한 침샘암 투병중)로 2010년 2월을 기해 연재중단을 선언하였다. 2010년 1월에는 죽음과 인생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을 담은 에세이집 『인연』을 출간하였고, 2010년 2월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를 선보였다.
2011년에는 투병 중 집필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했다. 이번 소설을 통해 등단 이후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제1기의 문학’과, 종교·역사소설에 천착했던 ‘제2기의 문학’을 넘어, ‘제3기의 문학’으로 귀착되는 시작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