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 Vita Activa 개념사 15
1. 자유를 향한 공공公共의 운동, 공화주의 ― ‘민주’와‘공화’의 균형을 위하여
많은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발달한 오늘날, 민주주의는 ‘시민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자유, 평등의 가치를 보존하는 체제’로서 충실히 작용하고 있을까? 근대 국가 확립 후 대의제 기구와 자본주의 및 시민 사회의 발전은 시장 논리와 자유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즉 정치의 역할이나 시민적 덕성보다는 시장 제도와 그 속에서 행동하는 개인의 사적 영역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가 확대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적 영역이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개인화되고 정치에 무관심해졌으며 이는 정치의 힘, 나아가 민주주의를 약화했다. 미국은 이런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공화주의 이론을 부활시킨 바 있다.
우리의 현실 또한 다르지 않다. 군사 독재에 맞선 오랜 투쟁 끝에 민주주의를 이뤄냈으나, 정치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야 할 정당 구조의 왜곡(최장집), 이념과 참여의 과잉(송호근)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완성을 방해해왔다. 또한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해 경제 논리가 사회 전 영역을 지배하면서 공공의 영역이 질식되고, 사회 양극화 속에 파편화된 개인들은 점점 정치와 멀어지고 있다. 자유의 확대가 불러온 민주주의의 축소라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또한 성숙하지 못한 정치의 과잉과 극단적 무관심의 공존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그 균형점으로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공화주의’ 개념이다. 공동체를 강조하고 시민의 참여를 추동하며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하는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의 확산과 공고화에 기여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한국 사회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개념들을 뽑아 그 의미와 역사, 실천적 함의를 해설하는 ‘비타 악티바Vita Activa|개념사’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권『공화주의』는 자유를 목적으로 공공선과 시민적 덕성을 추구하는 공화주의 이념을 서양 정치사와 ‘혼합정’ 이론을 중심으로 정리하며 현실과 연결 짓는다. 저자는 공화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공화주의에서 지나치게 공동체나 공공 이익, 시민적 덕성을 강조할 경우 과거 서양의 전체주의처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배타성만을 키울 수 있다며 그 위험성 또한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와 ‘공화’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고 이는 혼합정의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토크빌 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사상가와 그 시대에 주목하여 역사 속에서 각각의 시대 상황과 문제에 공화주의가 어떻게 대응하고 작용하여 자유와 공공선을 실현해왔는지를 분석하는 이 책은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소통, 국가의 역할에 균형을 잡아주는 공화주의 이념을 통해 제도권의 안팎에서 정치 공간이 확장되어 민주주의가 굳건히 확립되기를 희망한다. 민주주의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방치해두면 안 되는, 살아서 항상 변화하는 체제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는 ‘민주’가 아니라 ‘공화’를 통해 가능하다. 공화주의는 현재성, 현장성, 맥락성을 가지고 구체적인 상황과 문제에 대응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운동이다.
2. 자유, 법치, 시민적 덕성, 혼합정
동양에서 ‘공화共和’라는 말은 중국 주나라의 려왕이 폭정을 일삼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대신해 집정하던 시기(기원전 841~828)를 가리킨 데서 나왔으며, 이후 ‘공화제’란 왕 없이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되었다. 또 ‘republic(공화)’은 ‘공공의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공화제를 주장하거나 실현하려는 정치적 태도가 바로 ‘공화주의’다. 따라서 공화주의는 자유, 법치, 공공선, 시민적 덕성을 이념으로 하며 이는 정치 공동체 내 다양한 계층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혼합정의 정체 위에서 실현 가능하다.
혼합정의 관점에서 볼 때 공화주의의 핵심 가치는 주종적 지배 관계를 제어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공화주의에서 추구하는 자유는 일반적인 적극적, 소극적 자유 개념과 달리 타인의 자의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한 것이며, 이를 통해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안정 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공화주의는 타인의 자의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이를 제한하는 것으로서의 ‘법치’를 추구하며, 법에 의한 간섭, 나아가 국가의 공정한 개입을 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자의적이지 않은, 즉 보편적이면서도 공공선을 지향하며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법이 공공선을 위해 복무한다고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공공선을 목적으로 하는 법치가 이루어지려면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 즉 정치 공동체의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겠다는 시민들의 마음가짐과 태도로서의 시민적 덕성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시민적 덕성은 공공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공공선이란 정치 공동체 각 구성원들과 각 계층 간의 의견 조율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존의 이념이다. 공화주의자들은 갈등하는 쌍방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서로의 공존과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일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이익도 된다는 것을 깨달아, 법을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공화주의의 이념들은 ‘지배’가 없는 상태, 어느 한 측의 목소리가 과해지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혼합정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혼합정은 정치 사회의 다양한 계층, 세력들을 혼합해야 그 정치(정체)가 건강해진다고 보아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계층들 간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며, 공동체가 이렇게 다양한 계층들로 구성되게끔 각 계층 간의 균형과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처럼 공화주의는 공공선을 담보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시민들이 다른 시민으로부터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시민적 덕성을 실천하는 정치 질서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3. 귀족과 민중의 조화, 아테네와 로마의 공화주의
저자는 공화주의의 핵심이 되는 혼합정 이념이 처음 나타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시작으로 공화주의의 역사를 살펴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이던 아테네가 몰락한 원인은 가난한 자와 가진 자들이 자신의 일방적인 이익만을 위해 정치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민주정과 귀족정의 요소를 혼합한 혼합정 개념을 내놓으며 보다 완화된 민주주의를 꿈꾸었다.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도 로마의 성공 원인을 혼합정론으로 설명했다. 당시 로마 정체는 군주제의 특징을 갖춘 집정관, 귀족제의 장점을 살린 원로원, 민주제를 구현한 민회로 구성되는 혼합정 형태였다. 이 세 기구는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어, 권력 독점 시 발생하는 부패와 분열의 혼란을 사전에 방지했으며, 국외 정치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협력과 조화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힘을 모아냈다.
민주정이 ‘지배’를 함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런 극단화 경향을 완화하려는 혼합정의 이념이 로마 시대에 와서 지배가 없는 체제, ‘공화’의 이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로마 공화국의 혼합정은 권력을 사사화하지 않고 공공화하려 노력했다. 조국의 생존 위기를 타파하고자 고민하던 마키아벨리 역시 로마로 대표되는, 인민이 중심이 되는 공화제에서 자유의 정체를 보았다. 로마의 자유 정체는 각 정치 세력들이 이해관계를 사적 방의 정어니라 공적 방의으로 해결하게 하는 법 제도, 혈연이나 재산 정어니라 객관적 능력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게 하여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 나아가 정치 체제는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사익을 위한 방의과 제도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 중심의 이익, 즉 공공선을 위해 기능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같은 정치 참여, 법치를 통한 자유의 획득, 정치의 우선성, 시민적 덕성이라는 고전적인 공화주의 특징들은 마키아벨리, 토크빌, 아렌트 같은 공화주의자들에게로 계승되었다.
4. 마키아벨리, 토크빌, 아렌트의 공화주의
마키아벨리는 당시 도시 국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해 고대의 공화주의를 계승하는 독특한 공화주의 이론과 혼합정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조화와 통합만을 강조했던 그전의 공화주의 이론과는 달리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인정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 내부의 분열과 강대국의 침략이라는 시대 상황에서 국가 생존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고민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즉 마키아벨리는 갈등의 최적화를 통해 공동체 내부의 힘을 최대로 모아내고자 하는 활력의 공화주의를 주장했다.
또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정치학자, 역사학자인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이 주창한 평등은 프랑스에서는 자치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자율 정신 및 시민 의식을 체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자유가 부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깊이 뿌리내릴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토크빌은 평등이 전제적 지배를 행사하고 주인이어야 할 국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자유를 미국에서 찾았다. 토크빌이 생각할 때 자유란 자치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미국 건국 초기의 타운 같은 지방 분권적 제도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삶의 터전이자 정치 공간인 타운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그 운영과 유지에 참여할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자유란 정치에 스스로 참여할 때 나타나는 적극적인 자유이다.
토크빌이 강조한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치의 경험과 자유의 체화는 현대에 와서 아렌트의 논의로 이어졌다. 아렌트는 특히 모두에게 드러나는 공개적인 공간에서 공동의 문제를 논의하고 행동하는 공간인 공론장 이론을 통해 ?치를 바라보았다. 즉 정치는 국회나 청와대 같은 국가 기구에서 행해지는 공식 행위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 모여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서로를 드러내고 관계를 맺는 가운데 생기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 같은 새로운 정치관과 공론장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모여 발언하고 행동할 때 나타나는 ‘잠재적 권력관’ 개념을 도출해낸다. 잠재적 권력은 폭력을 중심으로 한 도구적이며 소유적인 기존의 권력 개념이 아니라, 실행 속에서만 또 집단 안에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작용은 시민들 간에서도 활발한 상호 작용을 일으켜, 잠재적 권력의 태동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5. 2009년 한국,‘민주’와‘공화’의 균형 잡기
공화주의의 핵심 사상인 혼합정은 지배와 배제의 경향을 제어하고 공치共治를 수립하려 하는 것이며, 세력 관계를 파악하면서 시중에 맞게 균형을 이루는 것에 무게를 둔다. 즉 혼합정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주의는 ‘인민에 의한’ 정체와 ‘인민을 위한’ 정체 사이의 균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의 확대이기도 하며 민주주의의 과잉을 제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은 자유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개인주의가 확산되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또 시장 논리, 서울로 대표되는 중심, 화폐 등의 물질이 지배하는 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다양성이 상실되고, 지배하는 자에게는 오만함을 지배받는 자에게는 비굴함을 양산해내고 있다. 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성공 제일주의 사회에서 구성원 서로는 유대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건전한 중산층이 줄어들고 빈부 격차가 심하며 갈등이 만연한 지금, 공적 영역을 강화하고 정치의 영역을 부활시켜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공화주의의 역할이 절실하다. 공화주의적 정치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하게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들이 참여하는 정치 안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태도도 가능하다.
공화주의를 통해 ‘민주’와 ‘공화’ 사이에서 균형과 무게중심을 잡아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 책은 이 균형을 담지할 현실의 정치 제도로 상원과 하원의 상호 견제와 역할 분담이 가능한 양원제를 모색하며, 더불어 시민 운동 단체가 시민의 정치 참여와 소통의 통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 속에서 드러나듯이, 역동성, 맥락성, 유연성이 특징인 공화주의에 영원불변한 정답은 없다. 공화주의는 계속해서 변하는 현실의 관계와 함께하는 하나의 운동, 더 나은 민주주의를 확립하려는 노력이다.
번호 | 별점 | 한줄평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수 |
---|---|---|---|---|---|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