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지상의 마지막 말들 2
책 소개
카프카의 지적 세계에는 문학적인 것과 비문학적인 것 사이에 구분이 없다. 일상적인 삶의 실행의 자료가 카프카에게서는 문학으로 바뀐다. 그의 팔절판 노트, 일기와 편지에서는 일상의 관찰들과 철학적 관찰들, 문학적 단장(斷章)들, 잠언들, 격언들이 발견된다. 이 책은 카프카가 남긴 그런 단편들을 모은 것이며, 2권의 주제는 ‘문학’이다.
카프카의 잠언적 글의 기본 모형은 순환 구조, 반복의 효과, 역설과 종결할 수 없는 변증법의 형식들이다. 카프카는 원(原)텍스트들, 전승된 규범들, 규칙들과 사고의 관습을 의심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요소들을 갖고 작업하면서 동시에 그 요소들의 구속력 있는 효력을 의문시한다. 카프카는 아이러니와 의심을 사용함으로써 확정된 그릇된 개념들, 견해들과 인식들을 배제한다. 그가 논증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정(否定)과 회의(懷疑)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는 모든 의미와 중심, 근원 등을 해석의 산물로 보며, 확고한 존재론적 토대를 지닌 영원불변한 진리를 부정한다. 카프카에게 진리는 아주 다양한 형상으로 등장할 수 있고 언제나 새로운 해석을 환기하는 그 무엇이다.
저자 소개
지은이
카프카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 상인의 아들로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에 막스 브로트와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1906년에 프라하 법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난 후 1년 동안 프라하의 형사법원과 민사법원에서 실무를 익혔고, 1908년에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취직했다. 그는 재해 예방 부서에서 중요하고 높은 지위에서 활동하면서 상사와 부하로부터 두루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산업재해 예방책 개선에 지도적이며 고무적인 역할을 했다. 직업과 문학적 소명 사이에서 몹시 갈등하면서도 직업의 요구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켰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미완성 작품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를 썼다. 1908년에는 잡지 《히페리온》에 1904년과 1905년에 쓴 《어느 투쟁의 기록》 중 두 개의 대화를 발췌해서 발표했다. 1910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는 자기 해명과 자기 형성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1912년 12월에는 《어느 투쟁의 기록》에 들어 있던 짧은 산문 소품들과 1910년에서 1912년 사이에 쓴 다른 산문 스케치들을 모아서 단편집 《관찰》을 출판했다. 1911년에서 1912년까지 장편소설 《실종자》를 집필했다. 1912년 9월12일에 단편소설 《판결》을 썼다.
《판결》을 집필하고 난 직후 단편소설 《변신》을 창작했다. 1914년 10월에는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아 《유형지에서》를 썼다. 거의 같은 시기인 1914년 가을에 장편소설 《소송》을 쓰기 시작했다. 《소송》의 창작은 1915년까지 계속 됐다. 1916년과 1917년에 대부분의 단편소설들이 창작됐고, 1920년에 《시골 의사》라는 표제로 묶여 출판됐다. 《단식 광대》라는 제목을 달고 1924년에 출판된 네 개의 단편소설은 1921년에서 1924년 사이에 쓴 것이다. 마지막 단편소설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족속》은 1924년 3월에 썼다. 1922년 ‘밀레나 위기’에 장편소설 《성》을 썼다.
그의 문학 작업은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었다.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그의 의식은 글쓰기를 통해 명료하고 자유롭게 되었다. 따라서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자아 실현을 위한 길인 동시에 살아보지 못한 삶의 대용물이기도 했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카프카는 글쓰기를 통해 의미 상실의 절망을 글쓰기의 즐거움과 유희로 뒤집으면서 끊임없이 권력의 담론에 저항하는 ‘지상의 마지막 한계를 향한 돌진’을 계속한다.
옮긴이
편영수는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카프카 문학에 나타난 진실과 허위의 모티프 연구》이다. 이후 LG 연암문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선발되어, 카프카 전문가인 카를하인츠 핑거후트(Karlheinz Fingerhut) 교수의 초청으로 독일 루트비히스부르크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키워드가이드 (‘카프카’, ‘독일문학’)로, 또 한국카프카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카프카의 인간성에 매료된 사람, 카프카의 독특한 생각의 깊이에 빠져 있는 사람, 카프카의 문학적 표현 기술에 경탄하는 사람,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탐색하고 전달하려는 사람, 카프카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다. 저서로는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 문학의 이해》, 《독일 현대 작가와 문학 이론》(공저), 《동서양 문학 고전 산책》(공저), 역서로는 《프란츠 카프카 :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 , 《카프카의 엽서》, 《카프카와의 대화》, 《실종자》, 《카프카 문학 사전》(공역) 등이 있다
핵심 메시지
카프카는 세계 해석에 고정된 의미는 없고 의미는 콘텍스트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고 본다. 콘텍스트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도 최종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런 시각에서 카프카는 해명하는 설명을 포기한다. 그의 주석들은 새로운 애매모호함을 초래한다. 카프카의 글은 해석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기존의 해석이 무효화되고 새로운 해석이 시작된다. 그 해석도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기표와 기의의 순환을 일시적으로 고정시켜 제한된 의미를 형성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라캉).
“해석할 수 없는 것은 해석할 수 없다.” 카프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책 속 & 줄거리
-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한다. 즉 진실과 허위. 진실은 나뉠 수 없다. 따라서 진실은 스스로 인식될 수 없다. 진실을 인식하려는 자는 허위임에 틀림없다.
- 고백과 거짓말은 동일한 것이다.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사람들은 사람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이 아닌 것뿐이다. 즉 허위인 것이다. 합창 속에나 겨우 어떤 진리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 죽는다는 것은 허무에 허무를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감정은 내어줄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단지 허무로서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허무에게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공허한 허무뿐 아니라, 활기 넘치는 허무에게. 허무의 무가치함은 오직 허무의 불가해성이다.
- 불행한 누군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우선 그가 세상과 발맞추어 걷지 않는다는 뜻이네. 더 나아가 모든 것이 그에게서 분리되었고 분리된다는 뜻이네. 또 어떤 견해도 굴절되지 않고 더 이상 그에게 도달하지 않아서 그가 어떤 견해도 솔직하게 따를 수 없다는 뜻이네.
- 악의 가장 효과적인 유혹 수단들 가운데 하나는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것은 침대에서 끝나는 여자들과의 싸움과 같다.
- 언어는 감각적인 세계 밖의 모든 것에 대해 암시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 결코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는 감각적 세계에 상응하여 오직 소유와 소유의 관계들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의 결정적인 특징은 덧없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세기란 것도 찰나의 순간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따라서 덧없음의 연속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폐허에서 새로운 삶이 꽃핀다는 것은 삶의 지속보다는 죽음의 지속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과 싸워 이기려 한다면, 이 세상의 결정적인 특징인 덧없음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내가 이 삶 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그저 희망이나 믿음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너는 세상의 고통을 회피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네게 달려 있고 네 본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회피가 네가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일지도 모른다.
- 겸손은 누구에게나, 고독하고 절망에 빠진 자에게도 동료 인간들과 가장 강력한 관계를 맺어준다. 그것도 즉시. 물론 그 겸손이 완전하고 지속적일 때만. 그 이유는 겸손이 진실한 기도의 말이며 동시에 경배이며 굳은 결속이기 때문이다. 동료 인간과의 관계는 기도의 관계이며, 자신과의 관계는 노력의 관계이다. 기도에서 노력을 위한 힘이 나온다.
-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 나는 고독해요. 프란츠 카프카처럼.
- 네 자신을 인식하라는 말은 너를 관찰하라는 뜻이 아니다. 너 자신을 관찰하라는 말은 뱀의 말이다. 그것은 네 행동들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그러나 넌 벌써 그러하니, 너는 네 행동들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그 말은 ‘너 자신을 오해하라!’, ‘너 자신을 파괴하라!’는 뜻이니, 무언가 나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주 깊숙이 아래로 몸을 굽힐 때만, 우리는 우리의 선한 것도 듣게 된다. 그 선한 것이란 ‘너를 현재의 너로 만들어라’이다.
- 내가 쓰는 단어는 거의 다른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 귀에는 마치 자음들이 쇳소리를 내며 서로 마찰하고 모음들은 전시회의 흑인들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같이 들린다. 내 의심은 모든 단어 주변을 맴돈다, 나는 단어보다 더 먼저 의심을 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단어를 전혀 보지 못한다, 나는 단어를 생각해 낸다. 사실 이것은 가장 큰 불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시체 냄새가 나와 독자의 얼굴 정면으로 오지 않게, 그 방향으로 시체 냄새를 불어낼 수 있는 단어들을 고안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작가들의 가장 널리 유포된 개성은 모든 작가가 아주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나쁜 점을 은폐한다는 사실이네.
- 시인은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죠. 시인에게 시인의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외침에 불과하죠. 예술가에게 예술은 고뇌예요. 이 고뇌를 통해서 예술가는 새로운 고뇌를 위해 자신을 해방하죠.
- 예술은 진실 주위를 날아다닌다. 그러나 화상을 입지 않으려는 단호한 의도를 드러내면서. 예술의 능력은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 힘차게 받아 모을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이 빛을 식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문학은 병이에요. 열을 내린다고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예요. 그 반대예요. 고열은 정화하고 빛나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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